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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4-2] 케인즈 거시경제학 & 하이에크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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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PART 4.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할 아이디어는 있는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2편 : 케인스와 하이에크

이번 편에서는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에 이어 두 명의 위대한 철학자를 소개한다.

바로 거시경제학을 주창한 케인스와 신자유주의의 하이에크이다. 


04. 실업률을 낮출 정부의 개입을 권하다.-케인스의 거시경제학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2010년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로존 재정위기를 거치며 신문에서는 연일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맞았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1930년 대 미국 경제대공황 때와 같이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다시 맞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자울적인 시장의 힘이 중요한 것이냐’의 논쟁은 무려 1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논쟁은 지금도 위기에 빠져있는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먼저 ‘정부 역할을 중요시’했던 케인스부터 만나보자.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4년간 지속되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31개 연합국은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열어 베르사유 조약을 맺고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게 240억 파운드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을 물게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곧이어 불어닥칠 위기를 가장 먼저 예감한 한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그는 [평화에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만약 고의적으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손쉽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감히 예언한다.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는 1914년 8월에 끝났다.’

독일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상금 때문에 할 수 없이 중앙은행을 통해 발행하는 화폐의 양을 크게 늘렸고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국채를 발행해 외국에 헐값에 파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1923년 7월 독일 내 물가는 1년 전에 비해 7천500배를 넘어섰고, 2개월 뒤에는 24만 배, 3개월 뒤에는 무려 ‘75억 배’로 뛰었다. 환율은 1달러당 4조 2천억 마르크가 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기댈 수 없다.

전쟁의 여파에 폐허가 된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끝없는 욕심은 거품을 만들었다. 일명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리던 1929년 10월 24일, 그 호황의 거품이 터지면서 결국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검은 목요일은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증권시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주가 대폭락 사건을 말한다. 1929년 9월 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당시 신기록이던 318.17이었다. 하지만 10월 24일 장이 마감할 시점에 지수는 299.47이 된다. 무려 20% 이상 하락했고 이날 하루만 무려 1천290만 주가 팔렸다. 종전의 기록이 400만 주였던 것에 비해 기록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시작된 주가 폭락은 이후 지속적으로 그 끝을 모르고 하락하면서 결국 대공항의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1930년 대 초반, 유럽의 이탈리아, 독일에서는 파시즘이 힘을 얻고 말았다. 독일 국민들은 빈곤과 실업과 혼란에 지쳐 히틀러에게 정권을 맡겨 버렸다. 이렇게 대공황과 전쟁의 위기가 몰아칠 때,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케인스는 1936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위기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해결방법을 다룬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케인스는 공황의 원인을 ‘수요 부족’이라고 주장했다. 소득이 늘어난다고 수요가 똑같이 늘어나지 않으며, 현실적인 수요량을 ‘유효수요’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어도 물건을 구매하려는 욕구는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가 잘 돌아가려면 소득과 수요가 거의 같아야 하는데, 덜 쓰다 보니 경기가 침체되어 공황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정부 역할’에 관한 케인스의 새로운 이론은 ‘거시경제학’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즉 미시 경제학이 주류였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 주체를 가계, 기업, 정부로 나눌 수 있다. ‘미시경제학’은 ‘가계와 기업’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며 시장에서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설명한다. 국가는 그저 전쟁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야경국가 정도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방임주의 국가관에서 국가는 시장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방과 외교, 치안 등의 질서유지 임무만 맡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케인스가 재무성에서 일할 때는 전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장의 원리’만 가지고는 경제를 논하기가 힘들게 된 것이다. 케인스는 시장의 원리를 넘어서 ‘경제 전체’를 봐야 한다는 ‘거시경제학’의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고용과 평등을 해결해야 한다.

거시경제학은 국민소득, 이자율, 환율 등 국가 전체와 세계에 관한 경제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정부의 계획적인 정책으로 가계와 기업을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그렇게 완전고용이 이루어지면 현실적인 수요가 놀어나 경제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매력이 없는 수요자가 일자를 통해 구매자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가 내린 ‘정부의 계획적인 개입’이라는 처방은 이제까지 세상을 지배해 온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중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인스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첫째는 좋은 수준의 고용률, 둘째 더 평등한 사회라고 보았다. ‘정부는 완전고용에 대한 책임이 있고, 최상의 고용률과 생산율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불평등한 소득분배는 세금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경제는 관리의 수요가 있을 때만 완전고용을 하려고 하는데, 전반적인 수요를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정부’뿐이라고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뉴딜정책을 만들었다. 실업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마련하고, 댐과 고속도로 등을 건설해 일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례 없이 강력한 규제방안을 실시했다.

정부의 역할이 커지다.

‘만약 고의적으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손쉽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했던 케인스의 예언은 적중했다. 1939년 9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해 다시 유럽에 피바람이 불어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까지 전 세계로 퍼졌다. 전쟁 결과는 참혹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과 재산피해를 낳은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돼서야 일본의 항복을 끝났다. 그 사이 케인스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독일 미국 모두에게 불황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돈을 빌려 전쟁에 쏟아부으니 실업률은 낮아지고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군수산업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고 이는 경제 전반에 파급력을 미치며 활력소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케인스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정부를 지배하는 경제원리가 되었다. 거시경제학은 ‘경제 전체’를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케인스 이론은 큰 정부를 만드는 데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세계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30년 동안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05. 정부가 커지면 비용도 늘어난다. -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불황과 물가상승의 동시에 덮치다.

런던대학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1944년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 [노예의 길]을 펴냈다. 하이에크는 너무 많이 투자됐고 너무 많이 써서 공황이 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의 조정능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시장의 자율성을 규제하게 되고 이는 비효율적인 체제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1970년 대에 들어서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호황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경기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오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이 현상은 케인스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다.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불황기에는 물가가 하락하고 호황기에는 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법칙이 깨지면서 반대의 현상이 생긴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69년 미국의 상황이었다. 불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계속해서 상승하는 일이 발생했다. 물가안정보다는 경기부양을 우선시하는 정책, 소수의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 등으로 인해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케인스의 설명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이에크이 주요 이론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불완전한 지식에 기초한다. 가장 똑똑한 인간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한 부분일 뿐 상대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통찰에서 하이에크의 주요 이론이 나왔다. 그는 ‘계획자의 부족한 지식 때문에 중앙경제 계획은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경쟁적인 과정에서 많은 의사결정자가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환경에서 의사결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노력하고 배우고 진화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결정이 옳고 어떤 결정이 실패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모든 의사결정을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실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주요 사상이다. 소비에트 연방 같은 대규모 중양 계획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화폐 및 경기변동에 관한 연구]로 하이에크는 말년이 197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그의 사상은 정치이론 또는 정치철학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영국 최초 여성 총리가 된 대처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대처리즘을 표방했고, 곳곳에서 국가와 정부의 활동영역을 축소시켰다. 그간 국가에 의해서 운영되던 상당수 국영기업을 민영화했고, 복지를 위한 공공지출을 삭감했다. 또한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이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했다. 이런 대처리즘의 표방으로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체제가 다시 부활했고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의 막이 올랐다.

고통스러워도 시장의 힘을 믿어라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규제 철폐가 시작되었지만 미국의 침제는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소련이 리더십을 잃어가면서, 경제위기 해결책이 마르크스가 아닌 시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은 무엇보다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양분화되었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에 대처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이때부터 복지보다 성장을, 정부의 역할보다 시장의 역할을 더욱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지구촌 경제를 휩쓸었다. 미국과 영국은 세계화를 주장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 시장 개방의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자유주의, 자유무역’이라는 논리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글로벌 경제와 위기의 도미노

그 결과 세계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또 미국과 영국은 금융산업을 무기로 세계화에 성공했고, 급기야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인 ‘금융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금융자본주의가 또다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첫 번째 파도는 멕시코를 엄습했다. 1994년 멕시코는 개방에 대한 압력으로 OECD에 가입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WTO가 출범하면서 저면적인 시장개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됐다. 경상수지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페소화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경제위기가 온 것이다.

대외시장 개방의 여파로 수입이 증가하고 수출이 부진해지자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멕시코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자본과 금융의 전면적인 개방이 어떤 위기를 불러오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1997년 발생한 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금융위기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태국, 말레이시아, 한국,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가 금융자본주의 이후 모두 고속성장을 보였지만, 그것은 거품으로 만들어진 인플레이션에 불과했다. 결국 2008년 철옹성이라 생각했던 미국까지 금융위기에 휩싸이고, 2010년 유럽으로도 금융위기의 본질이 번졌다. 사람들은 절망하기 시작했지만 이제 세계는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부와 빈곤의 양극화가 가속되고 불평등이 켜졌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자 케인스 주의자들은 이번 위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가 ‘괴물 금융’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하이에크 추종자들은 과도한 정부지출이 금융위기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시장을 조작하려는 정치적인 힘이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지금과 같은 소득의 양극화를 낳고 삶의 불안 요소를 양산한 것만큼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특히 양극화로 인해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우려스럽다.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3년 8월 현재 164%로 일본의 132%, 미국의 120%보다 훨씬 높다.

가계부채 때문에 부담이 생기니 소비가 위축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케인즈와 하이에크를 넘어서는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이 무엇일지 다음편을 기대해주기 바란다. 

2020/10/31 -  [자본주의 4-1] 위대한 철학가 -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자본주의 4-1] 위대한 철학가 -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PART 4.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할 아이디어는 있는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1편 :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돈이 생기고 금융자본이 시작되면서 자본에 의해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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